송민철우리의 지각에서 빠져나가는 것들다를 수도 있었던 세계에 대하여 


신현진



나의 시각은 옳은가적어도 내가 전체를 본 것이기나 한지바꾸어 말해 내가 실제라고 지각한 것들은 실재가 맞을까나는 물리적 현실인 실제를 넘어서는정신분석에서의 무의식과 상징계의 작용까지 고려한이 세계 전체의 존재론적 본질을 볼 수 있는가이 질문들은 송민철의 작품세계와 깊이 연관된다그는 인간의 인지 메커니즘이 지각한 데이터의 일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음에 주목한다그리고 이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의 기원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와 관련하여 전시작품에서 관점을 문제 삼는다우리가 가진 관점의 한계 너머를 제시해 다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질문을 만들어낸다먼저우리가 전시장을 들어서면 벽면을 따라 약 30 센티의 높이로 흰색 띠 모양의 페인트가 칠해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교실이나 가정집의 벽면의 바닥 부분에 붙이는 걸레받이 같은 것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이 흰색 띠 모양의 페인트 칠은 이번 전시의 기본 토대이다작가는 이 흰색 띠 모양의 페인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주어진 전시공간에 넣을 수 있는 가장 큰 구()의 부피 만큼을 칠한’ 것이라고 했다말 하자면 전시장에서 가상의 풍선에 물을 계속 채우다가 그것이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지점에서 터뜨리면 바닥에서부터 차오른 물이 약 30센티 높이에 다다른다는 셈법도 가능하다이 흰색의 띠는 전시장 공간을 가용 공간과 나머지 여집합으로 가른다바닥으로부터 30 센티미터 면적은 전시장 전체공간의 물리적인, 3차원의체험세계 중에서 우리가 실제라고 지각했던’ 공간이 차지하는 비율을 대리대표 한다따라서 가용공간의 부피는 우리가 지각한다고 생각하는 체적을 상징할 것이다그것이 겨우 30 센티미터 높이에 불과하고 정작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공간의 크기가 훨씬 크다는 것이 실망스럽긴 하다한편더 중요한 것은 전시장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여집합의 양이 우리의 지각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양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전시장 한 가운데 자리잡은 <과녁>또한 우리가 과연 전체를 지각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이라 볼 수 있다<과녁>에서도 여느 과녁과 다르지 않게 점점 더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작은 원이 차지한다과녁에는 보통 오방색이 사용된다오방색은 5개의 방향파랑은 동쪽빨강은 남쪽노랑은 중앙하양은 서쪽검정은 북쪽 방향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정되어 있다여기에 작가는 한국의 5음계에 해당하는 궁상각치우 음을 각각의 5방향에 대입하고 이를 가지고 사운드 작업을 만들어냈다당신은 과녁의 정중앙을 차지하는 색상이 무엇인지 아는가그런데 이 작품 앞에 머물다 보면 정중앙은 물론 과녁의 색상조합이 계속 변화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각각의 원의 면적에는 변함이 없지만 변화하는 다섯가지 색상의 조합은 5X4X3X2X1 이렇게 120개까지 만들어질 수 있다우리는 양궁경기나 삶의 어딘가에서 과녁을 보지만 정중앙의 색상을 기억할까우리 머리는 각자 정중앙에 위치한 색상은 빨강이라고 혹은 검정이라고 확신하고 있지는 않을까스포츠에 무관심한 나는 빨강이라고 생각했다.과녁을 관점에 대한 메타포로 가정해보자우리는 혹시 관점이라는 자신만의 과녁 디자인을 정해 놓지는 않았는가누군가는 자신의 기억대로 빨간색이 중앙에 들어간다고 고집을 부릴지도 모른다하지만 내 머리속의 과녁은이러저러하다고 내가 생각해온 바로 그 과녁 디자인은 120개의 가능 수 중의 하나일 뿐이다그리고 나머지 119개의 과녁조합은 우리의 인지 바깥으로 물러난다이 논리를 따라가 보면어쩌면 그의 조각작품 <Square Moon>은 사각의 공간에서 달모양의 구를 제거한 상태달의 부재를 보여주려는 노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직접 보거나만지거나냄새 맡지 못한 것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가 유일할 것이라고 했다지금 이 순간에도 표준규격의 과녁 없이 우리는 (게다가 당신과 나는 모르는 사이일 수도 있고 어쩌면 평생 만나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과녁에 대한 개념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마음껏 이야기하고 있다하라리는 과녁같이 단순한 개념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신이나 민주주의 같은 복잡한 개념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범주에 집어넣었다나는 하라리의 주장과 송민철의 작품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엇을 마음껏 떠들 수 있게 하는 인간의 인지 메커니즘이다

 

사실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인지 메커니즘 덕에 오늘날의 수준의 복잡성을 가진 문화를 이루었다그렇지않았다면 개나 고양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진화론은 인지를 할 수 있게 된 인간의 시작을 혁명이라 부른다인지 메커니즘은 추상화를 포함한다추상화란 수학에서 말하는 집합과 비슷한데 우리가 지각하는 정보의 특정 요소들을 예를 들어 A(5개의 원)와 B(5개의 색상과 C(그것이 배치되는 알고리즘등의 특징 A, B, C를 하나의 집합으로 묶고 거기에 과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하지만 올림픽 게임이라는 과녁보다 더 복잡한 개념을 소통하기 위해서는 몇 번 더 추상화가 수행되어야 한다우리는 올림픽 게임처럼 상대적으로 복잡한 주제를 마음껏 이야기 하기위해서 올림픽게임국가양궁과녁 … 등 상대적으로 간단한 여러 개의 집합들을 말풍선에 불러내 인지활동을 한다이러한 집합으로의 치환이 관념의 차원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두뇌의 뉴런 차원에서도 물리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인간 두뇌의800억개가 넘는 뉴런은 특정 정보의 전기자극을 함수로 치환하는 일을 포함한다그리고 이를 소통에 사용한다포에스터(Heinz von Foester)는 이를 소통의 재귀성이라 말한다그는 너무나 명백해서 의식조차 하지 않곤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이전에 집합이나 함수로 묶어 두었던 과녁같은 집합명칭을 동어반복의 방식으로 소통에 참조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자주 활용되는 단순한 과녁같은 특정 정보의 집합은 인지활동에서 계산하지도 않는다. 1차 의식단계에서 과녁=f(x)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불러내기만 하지 그것이 가진 ABC와 같은 특징은 우회한 채 인지처리를 완료해 버린다복잡한 생각을 해야 할 때주어진 지각 데이터가 뜻밖인 경우에만 그제야 장기기억에 저장된 다른 정보의 집합들을 불러내어 고도의식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인간의 인지 메커니즘이다.만약 당신이 온전한 소통을 원한다면 과녁이야 가능한 디자인이 그저 120개에 불과해서 전체를 가늠해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주제들은 800억개의 뉴런이 기억하는 바를 모두 확인하면서 정확한 소통을 하려 든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정신과 병동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양궁을 이야기하면서 과녁이라는 집합명이 언급될 때마다 과녁의 디테일을 상기하지 않으며 나머지 119개의 가능 수는 고려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우리의 인지는 과녁의 실재인ABC라는 특징들을 우리의 인지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둔다그래야 더 복잡한 개념을 연합할 수 있다어떤 특정 개념의 집합이 충분히 복잡한 함수가 된다면 그것을 우리는 수학에서의 공리 혹은 철학에서의 이데아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여기서 필자가 이야기하려는 바는 첫째우리는 과녁에 대하여 모르던 사람과도 마음껏 이야기하지만 나머지 119개의 변주는 언제나 빠져나가게 둔다는 지점이다과녁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궁을올림픽 게임을더 나아가 철학과 이데올로기같이 복잡성을 성취하는 진화의 역사 이면에는 다를 수도 있었던 세계를’ 망각하는 인지 메커니즘이 있었다둘째과녁의 정중앙이 검정색이라고 기억에 각인된 사람과의 소통에서는 껄끄러운 감정이 유발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철학자들은 이 빠져나간 부분으로 인해서 이전의 철학이 놓쳤던 지점을 논하기도 하며이론과 실천사이의 편차를 고발하기도 한다하지만 철학이 표현하는 방식은 이성과 언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반면우리의 직관은 행간을 탐험하면서 언어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송민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인지가 집합으로 만들어 놓은 관념의 바깥을 지각하고 감정을 품는다송민철이 지칭하는 여집합도 어쩌면 우리의 관점에서 빠져나간 무엇으로 구성된 다를 수도 있었던 세계의 요소일 것이다송민철의 작품은 우리가 우리에게 지각된 내용을 치환하는 활동을 하는 동안 빠져나가는 나머지이자 다를 수도 있었던 세계의 존재를 철학자의 언어가 아닌 지각 요소로 표현하고 있다그가 다를 수도 있었던 세계의 모습이 이러저러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송민철의 메시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의식이 말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제시하려 한다고 말이다누군가 그의 작품을 지각하고 동감하는 감정을 품는다면 바로 그 누군가의 감정을 감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일례로바디우는 이를 진리가 현시되는 순간이라고 했다.[2]그리고 이 감동이야 말로 과학과 철학의 이성적 언어가 아니라 다를 수 있었던 세계를 보여주고여기에 부응하는 그래서 여집합을 마음껏 이야기하기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하는 예술의 역능이다

 

예술이란 무엇일까적어도 작가가 아닌 우리들 관객에게 예술 작품이란 그 예술작품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그리고 감동이 없었다면 이야기를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적어도 마음껏 이야기하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예술의 효용가치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그래서 사회이론가 루만은 예술을 이렇게 정의한다우리가 “원칙상 소통될 수 없는 것[지각]을 사회의 소통 네트워크 안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라고.[3] 

 



[1]2차사이버네틱스(Second-order Cybernetics)를 완성한 물리학자 포에스터(Heinz von Foester)는 이를 다음의 논문에서 주장했다Heinz von Foerster, For Niklas Luhmann: How Recursive is Communication?,in Understanding Understanding: Essays on Cybernetics and Cognition, trans. Diane Slaviero and Louis Kauffman (New York: Springer, 2003), pp. 305-306.

[2]바디우『비미학』, pp. 9-35

[3]니클라스 루만『예술체계이론』, pp. 139-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