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원을 만드는 방법> 들여다 보기 위한 도구
클라우디오 제키
송민철의 작업 전반을 살피며, 우연히 이탈리아 저술가 키아라 발레리오가 쓴<수학의 인류사(The Human History of the Mathematics)>[1]를 읽게 되었다.
책의 한 부분에는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 유클리드가 말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께가 없는 직선, 완벽한 원주란 없다. 예수 탄생3세기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클리드가 자신의 책<원론(Elements)>의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상상의 조건들이란 온갖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 보다 더 심한 것들이다. 유클리드의 논리와 수학적 정리, 증거들은 이처럼 존재하지 않는 형태에만 적용할 수 있다. 삼각형을 그리거나 도형의 일부에 표시를 할 때마다,실제로 내가 했던 것은 상상이었던 것이다.”[2]
내레이션
이 점은 송민철의 작업<가장 큰 원을 만드는 방법>을 떠올리게 하며, 이 작업이 지닌 강력한 상상의 세계와 창조를 위한 능력, 무엇보다 거대한 이야기(narration)를 생각하게 한다.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작가는 우리를 그 이야기를 믿게 하는 상황에 집어넣는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믿는다면, 그것이 곧 진실이다.
“거짓(the false)이야말로 우리 세기의 열쇠다. 거의 모든 것이 거짓이다. 진실이기를 가정하는 예술이란 물론 거짓이다.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예술이 항상 진정성을 띤다. […]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가면을 써야하며, 솔직하고자 한다면 거짓을 살아내야 한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두는 일은 과대평가되었다.사람들은 마치 그 자체가 일종의 목적인 양“나는 내 자신이야.”라고 말하지만, 이는 솔직하지 못한 일이다. 상상력이 부족한 것일 뿐.”[3]
이것을 믿어야 한다면, 그렇다면 이는 믿음에 따른 행동인 것이다.
<가장 큰 원을 만드는 방법>에서, 작가는 원이라는 도형이“많은 요소(시간, 순환, 존재와 부재, 유한과 무한, 전체, 내 안의 모든 것)를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요소들은 전부에서 전무로 이어지는 무지개 위에 놓여 있으며, 개념적 참여, 즉 어떤 이야기를 완결하거나(재)창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관객 상호작용(설치된 작품 주변을 둘러보거나 통과하는 것)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도구이자 형식적 요소와 재료에 대한 분석으로써 송민철의 작업(Half Mirror – Rotation Axis,Flat Eclipse, Corner Mirror)이 들여다 보기 위한 도구가 되도록 한다.
“우선, 관람객들은 제 작업의 조형적인 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거울이나 원 같은 요소들의 의미와 함께 그것들이 작동하는 원리와(제가 만든)장치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4]
모순
주로 거울, 유리, 합판을 이용해 만든 이 작품들은 형식성을 강하게 드러내지만, 매우 연약하다. 이런 점에서 재료에 대한 접근이 아주 중요하다. 사실, 작가는 지속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모종의 장인과 같은 입장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재료들을 선택한다. 이런 점에서 송민철의 작업이 상당히 미완결적이고 구멍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작업들은(작가가 진행하는 연구의 일환으로) 일종의 계산된 오류를 숨기고 있으며, 이는 수행적 통합을 촉발하거나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관람객의 참여라 할 만한 무언가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궤적에서, 작가는 상상의 영역을 탐구할 뿐 아니라– 이런 점이 바로 모순인데– 실재의 영역에 관해서도 다시 사유한다.
건축, 시간, 공간
실제로 송민철의 작업은 항상 전시되는 공간에 맞춰 크기를 조정하지만, 그럼에도(아직) 작업의 크기는 휴먼스케일에 맞춰졌다. 따라서, 물리적이고 개념적인 상호작용, 즉 작품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나 이야기를 완결하는 것 역시 시공간의 개념을 포함한다.
그 자체의 여백에서 도래하는 비어 있음, 부재에서 유래하는 공간. 이 경우, 공간의 개념은 미리 규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공간과 작업 그 자체의 크기에 따라 변화한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송민철의 작업은 조각과 건축의 경계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옥의 처마의 곡선을 크게 연장하면, 세상에서 가장 큰 원이 만들어진다고. 그것이 바로 한옥의 선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와 닿는 이유라고 했다. 확인한 바 없지만, 그 때 나는 그 이야기를 그냥 믿기로 했다. 그 후 한옥의 처마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가장 큰 원’을 그려보는 싱거운 버릇이 생겼다.”[5]
이런 점에서, 송민철은 구조의 현상학을 탐구하고 예술품과 일상적 환경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며, 이를 통해 그가 기여하는 바를 예술, 즉 구조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공간을 구축하는 것과 현실(개별적 사물과 재료 자체에 존재하는 문화와 의미) 사이에 놓는다.
상상력의 실천
<가장 큰 원을 만드는 방법>은 작업이 지닌 유사-기능적(quasi-functional) 위치에서 분명 일관성의 결여를 야기한다. 이는 시선을 확장하며 사물을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만들지도 모르는, 작은 시야의 전환을 찾는 모종의 요청이다.
송민철의 작업에 가까이 다가갈 때, 작가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이러한 행위가 하나의 실천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키아라 발레리오가 유클리드에 관해 남긴 말에서도 동일하게 살펴볼 수 있다.
“수학이란- 나는 이러한 점을 벽에 걸린 드로잉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데- 그 어느 도시에 있는 교량이나 아스팔트에 관한 수학이라 할 지라도 결국 일종의 상상인 셈이며, 공간과 시간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 사랑과 죽음, 이상향들, 우리를 이렇게나 멀리 데리고 온 그 모든 유령들을 길러내는 것이다. 우리를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상력의 실천이며, 결국 유클리드가 말하는 것이 모두 존재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우리 모두가 이곳에 존재한다면 말이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