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원’에 대한 단상 - 신보슬





신보슬 (토탈미술관 책임큐레이터)

0.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옥의 처마의 곡선을 크게 연장하면, 세상에서 가장 큰 원이 만들어진다고. 그것이 바로 한옥의 선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와 닿는 이유라고 했다. 확인한 바 없지만, 그 때 나는 그 이야기를 그냥 믿기로 했다. 그 후 한옥의 처마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가장 큰 원’을 그려보는 싱거운 버릇이 생겼다.

1.
송민철 작가를 만났던 초여름 어느 날. 그의 작업에서 <가장 큰 원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장 큰 두 개의 판을 이용해서 한 판에서 가장 큰 반원을 만들어 서로 잇거나, 혹은 여러 개의 판을 원주 위에 모은 후 재단하는 방법으로 가장 큰 원을 전시장에 만들겠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작업에는 두 개의 큰 함정이 있었다. 첫째, 가장 큰 원이라는 것은 비교대상이 없는 상황에서 확인할 수 없다는 것. 둘째, 만들어진 원은 실제 빈 공간이고, 원주를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칼라와 재질의 종이들이 만들어낸 경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실제로 ‘가장 큰 원’은 종이의 부재로 인해 생긴 공간이다. 결국 관객은 비교대상이 없는 원을 가장 큰 원으로 바라보게 되지만, 사실 우리가 보게 되는 공간은 있지 않은 공간. 원의 외부를 둘러싼 존재로 인해 드러나는 부재의 공간이다. 직접 ‘가장 큰 원’을 만드는 대신, 원의 외부적 조건들을 규정지음으로서 원이 ‘만들어지게 만들었다.’ 물론 그가 제시하는 원은 수학적이고 물리적인 원이 아니다. 어쩌면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한옥의 처마와도 같은 관객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원에 가까울 수도 있고, 시트지 종이들이 만들어내는 무한 확장 가능한 특정 사이즈로 고정될 수 없는 원이다. 때문에 관객은 작품과 제목사이의 말장난처럼 여겨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되고, 시각적으로 단순한 그 ‘가장 큰 원’이 던지는 질문과 인식의 순환구조의 덫에 걸려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이 같은 특징은 거울과 무지개 모양의 반원을 수직으로 연결하여, 거울에 비친 허상을 통해 이미지가 완결되도록 하는 <half mirror>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2.
실재(혹은 실제 공간)가 부재(혹은 가상공간)를 규정하고, 실재를 통해 부재(의 원)을 인식하는 작업의 프로세스는 송민철의 작업에서 종종 사용하는 장치이다. 잘 알려진 <네가 그림>에서처럼, 그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에서 작업의 방식과 소재를 가져와 작품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변화되고 뒤틀린 공간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작품과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네가 그림>은 옮겨진 상을 현상하면 본래 피사체와는 반대의 형태로 나타나는 네가티브 필름(negative film)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캔버스 위에 색과 명암을 바꿔 음화(네가티브)로 그림을 그리고, 그 과정을 다시 음화 이미지로 촬영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서로 다른 차원의 공간들을 동일한 지평위에 올려놓고 보여준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낯설고, 어색하고, 이상하다. 분명 작가의 작업실 공간인데, 눈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는 우주의 어느 행성처럼 보이고, 익숙했던 사물들은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존재방식의 이미지로 읽힌다.

1-0.
송민철은 작업에 크게 힘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한껏 쉬워 보이고, 편안해 보인다. 물론 힘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작품에 대한 고민의 밀도가 낮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작품에 과한 힘들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바라보기가 수월해진다. 하지만 무지개모양의 작은 원과 거울, 거울 속에 맺힌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가 서로 의지하면서 만들어내는 긴장감, 실제 이미지와 허상의 이미지가 던지는 질문은 결코 쉽지 않다. 각기 다른 판자와 시트지로 만들어진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순한 ‘원’이지만, 이 원이 ‘가장 큰’ 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관객 앞에 나타날 때, 수많은 질문들이 생겨나게 된다. 물론 그 어느 질문도 정답은 없겠지만, 작품 앞에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경험이다.

0-1.
출근길마다 광화문 앞을 지나친다. 오늘따라 유난히 광화문의 처마선이 눈에 들어온다. 보이는 처마선이 만들어내는 허공의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원’을 그려보면서, 송민철의 원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